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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름 - 프로그래머 : 임백준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일하는 임금 노동자가 일을 통해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일은 드물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프로그래머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지만 프로그래밍이 결코 단순한 노동에 머무르지 않고 독창적인 창의성을 요구하는 창조적 활동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영어 등급'이나 '신발 색깔'과 같은 여러 가지 일들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서글픔을 자아냈다. 사소한 일들로 인해서 창의성이 억압받을 때마다 그림자 놀이를 하는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듯한 아픔을 느끼곤 했다. 그리하여 나는 유학을 결심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조금 더 본격적으로 공부해 보고 싶은 열망이 가슴에 차 올랐기 때문이다. 공부가 목적이라면 국내에서도 하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아직 '젊음'이 곁에 머무르고 있을 때 새로운 환경에 대한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그로부터 1년 뒤에 나는 6개월 된 아기를 안고 아내와 함께 낯선 땅에 도착했다. 그렇게 도착한 미국 중서부 인디애나주의 작은 도시 블루밍턴은 음악으로 유명한 젊음과 대학의 도시였다. ... 블루밍턴에 도착한 것은 1997년 6월이었는데 그 해 겨울이 되자 IMF가 터졌다. ... 한국의 원화를 기준으로 계산했을때 등록금이 거의 두 배 가까이 급등했기 때문에 그것을 감당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도 결국 일자리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GA(Graduate Assitance) 자리에 결원이 발생하여 새로운 직원을 공개 모집한다는 광고가 나왔다. TA나 RA와 똑같이 등록금도 면제되고 월급도 나오는 일이었다. 눈이 번쩍 뜨이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런데 그 일을 위해서 요구되는 프로그래밍 기술은 선마이크로시스템즈의 솔라리스 운영체제와 펄이었다. CGI에 대한 개념은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나는 그때까지 HTML로 이루어진 홈페이지조차 제대로 만들어 본 일이 없었다. 따라서 펄이라는 것이 시스템 관리를 위해서 유용하게 사용되는 스크립트 언어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지 펄을 이용해서 프로그래밍을 해본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당장 보더스라는 책방에 가서 '거금'을 털어서 랜달 슈왈츠의 Learning Perl을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다. ... GA자리를 위한 인터뷰를 준비하느라 급하게 시작한 공부였지만 그 공부의 속내용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다. 아파치 웹서버가 동작하는 원리, CGI 스크립트가 사용자의 요청을 처리하는 과정, 펄 스크립트 언어의 구조, HTML 태그의 구성, HTTP 프로토콜의 동작 원리 등을 공부하다 보면 재미 있어서 시간이 가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공부의 내용이 재미있을수록 GA자리를 꼭 얻고 싶다는 욕심으로 애가 탔다. 인터뷰의 뒷 이야기 GA일을 하면서 만나게 된 아드리안 저먼은 나의 첫번째 스승이 되었다. 그가 나와 충분히 친해 졌을 때 당시의 인터뷰에 얽힌 뒷이야기를 말해주었는데 그게 재미있었다. GA 포지션에 대한 광고가 나갔을 때 많은 사람이 신청을 해서 인터뷰를 여러 번 진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대한 offer는 최종적으로 어느 여학생에게 주어졌다.(나는 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갑자기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 그래서 그 오퍼는 다시 실시된 내부 심사를 통해서 다른 인도계 학생에게 주어졌다. 그 학생은 흔쾌히 오퍼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에 따른 서류가 처리되고 있었다.(이때 나는 마음을 졸이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학생마저 막판에 마음을 바꾸고 다은 RA 자리로 옮겨갔다. 인터뷰를 진행했던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내부 심사를 하면서 고민을 했고, 결국 그 오퍼를 나에게 주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물론 나는 오퍼를 얼른 받아 들였다.(그때는 이러한 속사정을 몰랐기 때문에 내가 잘나서 합격한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전혀 아니었다.) 보통 인터뷰가 끝나면 일주일 정도 안에 결과를 알려주는 것이 상례인데, 당시에는 이런 속사정 때문에 나에게 최종 결과가 알려지기까지 한 달이 넘게 걸렸다. ... 프로그래밍 자체와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 일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다른것이 아니다. ... 훗날 돌이켜 생각해 보았을 때 이 일은 나에게 두 가지 교훈을 주었고, 그 교훈을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첫번째 교훈은,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갖추어진 다음에 시작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만약에 내가 솔라리스와 펄을 다룰 수 있는 광고를 보고 지레 포기를 했더라면 좋은 기회를 스스로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것은 아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노력을 해서 되어 있도록 만들겠다는 배짱이다. 이것은 비단 일자리를 구하기 위한 면접 과정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생에 있어서 도전이란 결코 입맛에 딱 맞는 방식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두 발을 전부 땅에서 떼서 허공에 몸을 완전히 맡겨야 하는, 따라서 상당한 불편함과 두려움을 수반하는 방식으로 찾아온다. 어렵지만 마음에 쏙 드는 일자리를 만났을 때, 어렵지만 풀어 보고 싶은 문제를 만났을때, 어렵지만 한 번 걸어 보고 싶은 길을 만났을 때, 어렵지만 한 번쯤 말을 꼭 걸어보고 싶은 이성을 만났을 때, 필요한 것은 앞뒤를 재고 따지는 '계산'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허공에 몸을 맡기는 '용기'다.

두번째 교훈은, 한번 시작한 일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용기를 내서 몸을 허공에 던졌는데 그 다음 일을 수습할 수 없다면 돌아오는 것은 '망신'과 '자신감의 상실' 뿐이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수습의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는가 여부다.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나태하거나 방심하여 실패를 한 사람은 스스로를 믿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다시는 허공에 몸을 던지는 용기를 내지 못하게 된다. ... 내가 항상 도전하고 항상 최선을 다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때론 게으름을 부리고 때론 넓은 길을 골라서 가려고 애쓴다. 하지만 젊을수록 그리고 창창한 미래가 앞에 놓여 있을수록, '용기' 와 '최선을 다하는 자세'는 중요하다. 이 책을 읽는 후배 독자들 중에서 특히 이제 막 스무살을 지났거나 아직 스무살조차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훌륭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 그리고 훌륭한 프로그래머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을 말하라고 하면 나는 이 두 가지를 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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